유형문화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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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군부청헌당(三軍府淸憲堂)

삼군부청헌당(三軍府淸憲堂)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유산 제16호
위치 : 공릉동 육군사관학교 내

삼군부는 조선조 초기의 군무를 총괄하던 관청인의 흥삼군부를 줄여서 부르는 말로 조선말기에 이르는 동안 여러 번 명칭이 바뀌었다. 삼군부는 중군·좌군·우군으로 나뉘며 전국의 군사업무를 담당하고 대궐의 수위, 도성의 순찰권을 가졌었다. 이 목조건물은 1868년에 지은 조선말 대표적 관아 건축물로 현재 육군사관학교 내에 소재하며 1967년 정부종합청사 신축시 이 곳으로 이전되었다.

연령군신도비(延齡君神道碑)

연령군신도비(延齡君神道碑)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유산 제43호
위치 : 공릉동 육군사관학교 내

이 비는 오위도총부 도총관이었던 연령군이 병환으로 자식도 없이 어린 나이에 죽자 숙종이 아들을 위하여 숙종 46년(1720년)에 세운 것으로 그 내용은 연령군의 사망과 비를 세우게 된 이유, 일생, 품행, 숙종에 대한 지극한 효행 등이 기록되어 있다.

원래의 자리는 동작구의 대방초등학교 교정이었으나, 1940년에 묘역은 충남 예산군 덕산면으로 옮겼고, 비석은 1967년 8월 3일 현재의 자리로 옮겨 세웠다. 비문은 숙종때 우의정을 지낸 이이명이 지었으며, 글씨는 조태구가 쓰고, 제목은 민진원이 썼다.

연령군은 숙종의 여섯째 아들로 휘는 헌(훤)이고 자는 문숙(文叔), 시호는 효헌(孝憲)이다. 관직으로는 종부시 도총부 사옹원의 별직을 겸직하였고 두차례에 걸쳐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역임하는 등 군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왕릉의 신도비는 문종때에 금지되었으므로 세종대왕의 신도비가 왕릉의 신도비로서는 마지막이었으나 숙종은 연령군의 죽음을 애도하여 특별히 신도비를 세우게 했다.

이명신도비(李蓂神道碑)

이명신도비(李蓂神道碑)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유산 제55호
위치 : 월계동 767번지 2호

이 신도비는 조선 명종때 좌의정을 지낸 청백리 이명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으로 선조 7년(1574년)에 건립되었다. 이명(1496~1572)선생의 자는 요서로서 연간현감 이보간의 아들로 태어났다. 조선중기의 문신으로 중종20년 사마시에 합격, 1528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1544년 직제학으로 승진하여 동부승지·우부승지가 되었으며 1553년 이조참판이 되어 특진관으로 입시, 을사사화 때 화를 입은 사람의 신원을 주장하여 왕의 승낙을 얻고 그날로 형조판서에 올랐다. 이어서 호조, 공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1564년 우의정이 되었다. 성품이 단정하며 직무에 충실하였을 뿐만 아니라, 올바른 주장은 절대 굽히지 않았다 한다. 일생을 청백리로 일관하다 생을 마쳤으며, 죽은 후 정간이라는 시호가 붙여졌다.

비는 네모난 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운 모습이며, 비몸의 윗쪽 양변을 둥글게 다듬었다. 받침돌은 윗면에 연꽃무늬를 둘렀으며, 옆의 4면에는 안상(眼象)을 얕게 새겨 두었다.

선조 7년(1574)에 세운 비로, 대제학과 우의정을 지낸 김귀영이 비문을 짓고, 병조판서 신충겸이 글씨를 썼다.

이밖에도 묘역에는 공의 부, 조모 삼대의 분묘와 실전된 선조들의 설단이 있다.

충숙이공영정(忠肅李公影幀)

충숙이공영정(忠肅李公影幀)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유산 제70호
위치 : 하계동 한글비석로 144 (산16번지 1호)

조선 중기 문신 이상길(1556~1637)의 영정으로 하계동 산16-1번지 충숙이공묘역 충영각에 봉안되어 있다. 이상길은 자는 사우, 호는 동천, 본관은 벽진이다. 인조때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으며 1637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영위사가 되어묘사를 받들어 강화도에 들어갔으나, 다음해 청나라가 강화도로 몰려오자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그 뒤 그의 충절을 기려 좌의정에 추증되었고 충숙공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이 영정은 가로 82.7㎝, 세로 180㎝의 크기이며 낮은 사모에 담홍색 단령을 입고 공수자세로 앉아 있는 모습이 매우 안정적이다.

충숙공 이상길 묘역(忠肅公 李尙吉 墓域)

충숙공 이상길 묘역(忠肅公 李尙吉 墓域)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유산 제69호
위치 : 하계동 한글비석로 144 (산16번지 1호)

신도비란 임금이나 고관의 평생업적을 기록하여 그의 묘앞에 세워두는 것으로, 이 비는 조선 인조때 좌의정을 지낸 이상길 선생의 공적을 기리고 위해 현종2년(1661)에 건립되었다.

공은 명종11년(1556)에 태어나 30세에 문과에 급제한 후 예조.병조참판, 대사간, 대사헌을 거쳐 공조판서를 역임하였으며, 인조15년(1637) 병자호란시 청나라 군대의 침입에 항거하여 강화도에서 종묘를 지키다 82세에 순절한 충신으로, 효종8년(1657) 충숙공으로 사시되었다.

충숙공신도비는 당대 명문인 성균관 제주 송시열이 짓고, 송준길이 글을 썼다.

이 비는 총높이 3.16m, 비신높이 2.19m, 폭 0.89m의 규모로서 화강석으로 되어 있다.

남지기로회도

남지기로회도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유산 제81호
남지기로회도

남지기로회도는 기로회의 기신들과 연로한 임금과의 모임을 조선 중기의 도화서 화가 이기룡이 1629년에 그린 보물 제866호 〈이기룡필남지기로회도〉를 본 떠 그린 계회도이다. 위와 같은 내용은 작품에 박세당의 자세한 발문이 후기되어 있어 알 수 있다.

〈이기룡필남지기로회도〉는 인조 7년(1629) 음력 6월 5일 숭례문 앞 홍첨추의 집에서 열렸던 기로회를 기념한 작품으로 홍첨추는 계회에 참가했던 12명의 인물 중 한 명인 홍사효로 추측되는 인물이다.

〈이기룡필남지기로회도〉를 병자호란 이후 모사한 남지기로회도에는 숙종 17년(1691)의 간지가 있다. 이 작품의 범본이 되었던 〈이기룡필남지기로회도〉와 비교했을 때 원본에서는 구름과 안개로 거의 가려져 있던 부분인 작품 하단의 성루와 그 좌우로 둘러쳐진 성벽이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는 점, 하단에 그려진 버드나무의 묘사방식이 다르고 상단 우측에 연운 사이로 보이던 수목이 사라진 점, 연못의 경계가 뚜렷해 진 점, 그리고 계회 장면의 왼쪽 뒤에 앉아 있는 인물들의 수가 많아진 점 등에서 약간의 차이성이 보여 범본에 의거해 그린 것이지만 원본과 완전히 일치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남지기로회도는 모사본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경직된 면이 화면 전반에 많이 드러나 있고, 색감 표현에서도 원본의 은은한 아름다움을 살리지 못해 전체적으로 볼 때 작품의 품격은 원본에 미치지 못한다.

학도암 마애관음보살좌상(鶴到庵 磨崖觀音菩薩坐像)

학도암 마애관음보살좌상(鶴到庵 磨崖觀音菩薩坐像)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유산 제124호
학도암 마애관음보살좌상

불암산 학도암에 있는 거대한 암벽에 새겨진 폭 7m, 높이 13.4m의 마애관음보살상이다.

관음상은 10개의 이중연꽃으로 만든 대좌 위에 결가부좌를 하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으며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명성황후에 의해 조성되었으며 바위 옆면에 50자로된 조성명문이 남아 있어 그 가치를 더욱 높여주고 있는 뛰어난 걸작품이다.

학림사 삼신불괘불도

학림사 삼신불괘불도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유산 제211호
학림사 석불좌상

이 괘불은 조선후기의 삼신불 괘불탱으로, 조성연대는 1749년이다.
현재 남아있는 화기에 의하면 1774년에 중수하여 원통암에 봉안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그 이전에 썼던 화기를 조사한 결과 ‘乾隆十四年己巳八月’이라는 화기가 확인되어 최초 조성연대는 1749년으로 보인다.

크기는 세로 443cm, 가로 256cm로 괘불로는 그리 크지 않은 작품인데, 폭 61.5cm의 비단을 4폭 이은 후 왼쪽 가장자리에는 29.5cm의 비단을 이어 마감하였으며, 배접지는 8겹을 붙였다.

그림의 형식은 화려한 채운 아래에 법신 비로자나불, 왼쪽(향우측)에 보신 노사나불, 오른쪽에 화신 석가불 등 권속 없이 나란히 서있는 3구의 삼신불만을 배치한 간단한 형식을 보여준다.

따라서 학림사 괘불은 간단하면서도 노사나불이 보살형으로 표현되는 전형적인 삼신불 구성을 보여주고 있어 비교적 이른 시기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현재 서울지역에 남아있는 괘불 중에서도 가장 이른 시기의 작품이자 조선후기 서울.경기지역 괘불의 특징적인 양식을 반영하는 작품이다.

염불사 목관음보살좌상 및 복장일괄

염불사 목관음보살좌상 및 복장일괄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유산 제250호
염불사 목관음보살좌상 및 복장일괄

이 불상은 수락산의 염불사 큰법당에 봉안되어 있는 좌고 63cm에 달하는 중형의 보살상으로서, 1695년(강희34년)에 조성된 것이다

복장에서 발견된 조성기에 의하면 박삼룡, 박용산 등의 시주에 의해 전라도 장흥 사자산 봉일암, 수도암의 불상으로 조성되었으며 유명한 조각승 색난의 제자인 득우와 덕희가 조성한 불상이다.

불상의 내부 복장에서는 원문과 함께 후령통과 법화경 3책, 주사다라니 등이 발견되었다. 조성 원문은 다음과 같다.

이 관음보살상은 17세기 후반기에 전라도 지역에서 활동한 색난파 조각승인 덕우와 덕희가 조성한 것으로, 보존상태도 양호하며 조성원문이 남아있어 작가와 조성사찰 및 존명 등을 잘 알 수 있고 조각수법도 우수하여 17세기 후반 목조보살상의 전통적인 양식을 보여주는 귀중한 예이다.

염불사 지장시왕도

염불사 지장시왕도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유산 제251호
염불사 목관음보살좌상 및 복장일괄

이 불화는 1869년에 위국과 처 박씨, 유오가 돌아가신 부모님의 명복을 빌며 조성하여 감로암에 봉안한 것으로 19세기 전라도 지역의 대표적 화승인 금암당 천여와 제자인 취선, 묘영이 함께 조성하였다.

19세기의 불화 채색이 대체로 원색적인데 비하여 이 불화는 주색인 붉은색과 푸른색이 색채대비의 조화를 이루면서도 채도를 낮추어, 은은하면서도 맑은 17세기 불화채색 양식을 계승하고 있다는 점이다.

불화의 화기는 다음과 같다. 이 불화는 19세기 전라도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대표적인 화승인 금암당 천여와 제자인 운파당 취선, 향호당 묘영이 함께 그린 것으로 1869년에 조성하여 감로암에 봉안하였던 작품이다.

양식면에서 크지 않은 화폭에 많은 권속들을 표현하면서도 여유 있는 구성을 보여주는 것이라든지 수염 하나하나까지 그릴만큼 섬세하면서도 정교한 필선과 화려하면서도 정교한 금니 문양의 표현 등이 매우 뛰어나다

도선사 석 삼존불상

도선사 석 삼존불상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유산 제281호
도선사 석 삼존불상

현재 도선사 법당에 봉안되어 있는 돌로 만든 삼존불좌상으로 삼존불 가운데 본존상은 좌우의 두 상에 비해 약간 큰 편이다. 중앙에 있는 본존불은 원래는 얼굴이 동그랗고 온화한 모습의 불안(佛顔)이었던 것으로 보이나, 지금은 마멸이 심하여 이목구비를 잘 알아볼 수 없다.

목과 백호가 새겨진 부분도 손상되어 후보(後補)된 상태이다. 대의는 어깨를 드러내는 편단우견식으로 입었고 어깨와 무릎에는 넓은 띠주름이 새겨져 있다. 오른손은 올려 수인을 결하고 있다. 향우측의 협시상은 머리 위에 원통형 보관을 쓰고 두 손으로 화염보주같은 지물을 들고 있으며 양 어깨 위에는 넓은 옷주름이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허리가 짧고 무릎 높이가 낮아, 전체적으로 본존상보다 왜소한 느낌을 주며 뒷면은 조각이 되지 않아 밋밋하다. 향좌측의 협시상은 머리가 없어진 것을 석고로 만들어 붙여 다소 부자연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다.

정면은 통견식으로 법의를 입은 듯하고 양어깨에는 옷주름이 새겨져 있으나, 뒷면에는 편단우견식으로 오른쪽 어깨를 벗고 옷주름이 넓은 간격으로 사선으로 새겨져 있고, 두 손은 마주 대어 수인을 결하고 있다. 다리 위에는 옷주름이 사선으로 새겨져 있다.

이 불상은 전체적으로 체구의 비례면에서 균형감이 다소 떨어지고 훼손된 측면이 있지만, 세 상 모두 전체적으로 양감이 있고 안정된 자세를 보여줘 고려시대 석불의 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 불상은 목불이나 금동불에 비해 석불이 많이 전하지 않는 고려말~조선초기의 석조삼존상이라는 점에서 가치가 있어 서울시 유형문화유로 지정한다.

기원사 독성도

기원사 독성도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유산 제282호
기원사 독성도

청록산수 화법으로 그려진 소나무 아래 앉아있는 빈두로존자(賓頭盧尊者)를 그린 독성도(獨聖圖)이다.
빈두로존자는 16나한을 대표하는 신앙의 대상으로 석가모니불의 정법을 수호하며, 중생을 제도하는 역할을 맡은 나한으로서 독성(獨聖)이라고도 불린다.

그 모습은 흔히 눈썹이 길게 늘어진 노인으로 표현된다. 화면의 중앙에는 흰 눈썹 가닥이 길게 아래로 늘어진 빈두로존자가 시선을 오른쪽으로 향한 채 오른쪽 어깨를 비스듬히 기울이고, 오른손을 무릎에 놓은 자세로 앉아 있다. 머리 뒤에는 광배가 표현되었고 몸에 입은 붉은 가사는 왼쪽 어깨 아래로 흘러내려 뼈가 드러나는 앙상한 가슴이 보이며 그 아래로 녹색 법의를 받쳐 입었다. 가사의 끝단에는 화문(花文)이 장식되어 있는데 적색․녹색의 복식과 더불어 매우 화려하다. 존자의 오른편에는 고목둥치가 있고 그 위에 세발향로가 올려져 있다.

소나무 그늘 위에는 흰 구름이 펼쳐지고 그 사이로 푸른 하늘과 붉은 태양이 조금 드러나 있다. 화면의 우측 하단의 화기(畵記)는 푸른 안료로 덧칠되어 전체를 판독하기 어렵지만 “공양(供養)”, “원(圓)” 등의 몇 자는 알아볼 수 있다. 이 불화는 전체적으로 화기가 훼손되어 조성시기 및 화원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알 수 없지만, 적색과 녹색을 주조로 백색과 청색을 함께 사용하는, 19세기 중반 이후 불화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색채감과 짜임새 있는 구도가 돋보이는 작품이므로 서울시 유형문화유산로 지정한다.

묘법연화경 권 1~7(수도사)

묘법연화경 권 1~7(수도사)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유산 제286호
묘법연화경 권 1~7(수도사)

묘법연화경은 요진 시대인 406년경에 처음으로 한역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부처의 40년 설법을 집약하는 정수를 담고 있는 경전이다.

화엄경과 함께 대승불교의 2대 경전의 하나로 줄여서 “법화경”이라고 한다. 이 경의 내용은 가야성에서 도를 이룬 부처가 세상에 나온 본뜻을 말한 것으로 쿠마라집(鳩摩羅什)의 한역에 송나라 때의 승려인 계환이 주해를 한 것이다.

수도사 소장 묘법연화경은 모두 7권7책으로 권 책수로는 전질이다. 전 7책중 제1책(제1권)만 다른 판본이다. 제2책~제7책에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이라는 제첨이 있는 것과는 달리 제1책은 제첨은 없이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이라는 표제(表題)가 있다. 또한 판목의 크기에도 차이가 있어 가로는 14.2-3cm로 거의 동일하나, 세로 크기는 제1책이 다른 책보다 약 1.0cm가량 크다. 제1책의 권두에는 “대시주장사남(大施主張嗣南)/곤장(輥粧)”이라고 새겨진 꽃문양에 이어 변상도가 있다.

제1권 끝에는 “주상삼전수만세(主上三殿壽萬歲)/대시주김난연(大施主金難連)/비구 학일(比丘 學日)/ 비구 태진(比丘 太眞)...인경화주 신경(印經化主 信冏)”에 이어 “천계이년(1622)임술칠월일인경(天啓二年壬戌七月日印經)”과 같이 이 책의 인경목적과 시기를 적은 묵서가 있다. 이 기록으로 본다면 제1책은 1622년 또는 그 이전에 개판된 것이다.

제2~7책(제2~7권)은 효종즉위년(1649년) 6월부터 8월까지 양산의 통도사에서 간행한 간본이다. 이러한 사실은 제2권과 6권을 제외한 각권의 끝에 새겨져 있는 간기를 통해 알 수 있다.

제3권의 끝에는 “왕비전하수제년 주상전하수만세 세자저하수천추(王妃殿下壽齊年/主上殿下壽萬歲/世子邸下壽千秋)”에 이어 최기량(崔己良) 등 대시주 명단과 교정자 명단 등이 있고,“순치육년기축 유월일경상도양산지통도사개간(順治六年己丑(1649)六月日慶尙道梁山地通度寺開刊)”이라고 되어 있다.

제4권의 끝에도 “왕비(王妃)...주상(主上)...세자(世子)...”에 이어 권3과 같이 시주자와 대덕 등의 명단이 있고, “순치육년기축유월일경상도양산지취서산통도사개간(順治六年己丑六月日慶尙道梁山地鷲栖山通度寺開刊)”이라는 간기가 있다.

제5권의 끝에도 대시주자 명단과 “순치육년기축팔월이십일양산지통도사개간(順治六年己丑八月二十日梁山地通度寺開刊)”이라고 되어 있다. 제7권에는 이 경의 간행목적이 “왕비전하수제년 주상전하수만세 세자저하수천추(王妃殿下壽齊年/主上殿下壽萬歲/世子邸下壽千秋)”외에 당시 청나라와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생활이 핍박했던 탓인지 “나라에는 전쟁이 없이 국토가 평안하고 온 백성이 농상(農桑)의 일을 잘 할 수 있기를 바란다”라고 덧붙여 놓았다. 이어 “통도사에서 중간(通度寺重刊)”한 사실을 새겨 놓았다 당시 중간할 때의 저본은 세종 25년(1443)에 성달생의 판하본(板下本)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제2-7책은 권두와 권말에 소장자의 것으로 보이는 대형 장서인(藏書印)이 있고, 이 책의 원소장자의 것으로 판단되는 두주(頭註)가 각 면에 걸쳐 있다. 이 책과 같이 효종 즉위년(1649)에 간행한 통도사 간본은 국립중앙도서관에 1책(제4권), 영남대학교 도서관에 1책(제3권), 고려대학교와 경상대학교 도서관에 각 2책(권1-2), 성암고서박물관에 3책(권1-3) 등이 전하나, 모두 완질은 아니다.

수도사 소장본도 완질은 아니지만 6권 6책으로 기존 소장본보다 많으며 보존상태도 양호한 편이고, 권2~7에 묵서(墨書) 두주(頭註)가 있어 이 책의 가치를 높여준다는 점에서 서울시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한다.

수문장계회도(육군박물관)

수문장계회도(육군박물관)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유산 제303호
수문장계회도(육군박물관)

1630년을 전후한 시기에 조선시대 종4품 관청인 수문관청(守門將廳)에 소속된 수문장들의 계회를 그린 계회도이다. 전서체의 제목과 그림, 좌목 세 부분으로 구성된 전형적인 계축의 형식이다. 좌목에는 품직, 이름, 자, 생년, 무과 합격년도, 본관, 거주지 등과 부친의 품직과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좌목 서두에 “守門將廳”이라 쓰여 있어 계회도의 제작 주체가 수문장들이며 총 19명의 수문장들이 모였었음을 알 수 있다. 19명의 수문장은 강옥(姜沃, 1588~), 김충립(金忠立, 좌목에 생년 기록 없음), 안수익(安受益, 1577~?), 박준민(朴俊敏, 1586~?), 성진창(成振昌, 1603~?), 민태형(閔泰亨, 1593~?), 김익견(金益堅, 1599~?), 이영(李泳, 좌목에 생년 기록 없음), 이익선(李益善, 1596~?), 경유종(慶有宗, 좌목에 생년 기록 없음), 윤중영(尹重榮, 1588~?), 신영(申濚, 1597~?), 김여효(金汝孝, 1601~?), 신위망(申魏望, 1598~?), 김영(金嶸, 1601~?), 권항(權恒, 1575~?), 윤훈(尹壎, 1585~?), 김형(金珩, 1587~?), 이구(李玖, 1592~?) 등이다.

또한 좌목을 통해 그들의 생년을 알 수 있으며,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를 통해 안수익이 1627년 5월, 김충립이 1628년 5월, 김여효가 1629년 2월~7월, 윤훈과 김영이 1629년 7월, 신위망이 1630년 6월, 성진창이 1631년 5월에 수문장이었음을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아울러 그들의 거주지가 서울을 비롯하여 해주, 울진 등 전국 각지에 분포하는 것으로 보아 전․현직 수문장들이 한 자리에 모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계회의 설행일시는 그림이나 좌목 서두에 명시되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 작품에는 설행일시가 적혀 있지 않다. 그러나 좌목에 기록된 인물들의 관직 재임시기로 상정해 볼 때 1630년을 전후한 시기 즉, 1627년(인조 5)부터 1631년(인조 9) 사이에 계회가 열린 것으로 판단된다.

그림은 한강변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근경은 왼편으로 치우친 언덕과 차일 아래 늘어선 인물들이 등장하고 있다. 중경은 넓게 흐르는 강과 사구(沙丘), 작은 봉우리로 구성되었으며, 원경은 산으로 이루어져 16세기 이래 실경산수를 배경으로 한 계회도의 한 종류인 ‘잠두봉계회도(蠶頭峯契會圖)’ 계열의 그림임을 알 수 있다. 차일 아래에는 중앙의 인물을 중심으로 좌우로 8명씩 총 17명의 인물이 나란히 앉아 있으며, 말을 탄 1명의 인물이 뒤늦게 도착하는 모습을 그렸다. 색채는 녹색과 적색, 청색이 사용되었다. 산수는 녹색의 담채를 사용하였고, 건물의 지붕과 시녀의 복식, 술항아리가 놓인 탁자, 원경(遠景)의 해 등에는 선명한 적색이 사용되었다. 적색의 사용에는 부분적으로 후대의 가채(加彩)흔적이 관찰된다. 차일의 밑단에는 청색의 담채가 보인다.

장황(粧䌙)은 마름모형 사방연속무늬가 있는 미색의 비단으로 그림의 가장자리[변아(邊兒)]를 두르고 꽃무늬가 있는 감색 비단으로 위․아랫단을 꾸몄다. 상축(上軸)에 쇠고리 2개가 남아 있어 자료적 가치가 크다. 제작 당시의 최초 장황 상태가 아니라 후대에 개장된 것이지만 원래의 장황 재료를 십분 활용한 것으로 보이며 장황의 형식이나 쇠고리의 유존 등 오래된 조선시대의 장황 양식을 알 수 있는 귀한 자료이다.

육군박물관 소장 <수문장계회도>는 17세기 전반기에 제작된 현전하는 유일의 수문장청(守門將廳) 계회도로 한강변의 실경을 배경으로 한 17세기 전반기 계회도의 일례로서 가치가 있어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한다.

장양공정토시전부호도(육군박물관)

장양공정토시전부호도(육군박물관)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유산 제304호
장양공정토시전부호도(육군박물관)

조선 중기 함경북도 병마절도사 장양공(壯襄公) 이일(李鎰, 1538~1601)이 함경도 지역을 침략하던 여진족 시전부락을 정벌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장양공정토시전부호도(壯襄公征討時錢部胡圖)’라고 쓴 전서체의 제목과 그림, 좌목으로 구성된 전형적인 계축 형식이다. 맨 아랫단 좌목의 말미에는 8세손 1849년 윤하(閏夏) 일자의 이재관(李在寬) 글이 있어 여진족 시전 부락을 토벌하게 된 경위와 그림의 제작 경위를 알 수 있다.

제목과 그림, 좌목을 붉은 선으로 구획하고 좌목에도 붉은 선으로 인찰하였다. 좌목에는 대장(大將)인 함경북도 병마절도사 이일과 그 휘하의 조전장(助戰將) 서득운(徐得運), 종사관(從事官) 이용순(李用淳), 승의랑(承議郞) 심극명(沈克明), 심약선교랑(審藥宣敎郞) 이혜정(李蕙汀), 조전장 7명의 이름이 쓰여 있다. 이어 선봉장(先鋒將)인 고령진(高嶺鎭) 병마첨절제사 유극량(劉克良)을 포함한 22명의 좌위(左衛) 소속 군병, 선봉장 함경북도 조방장(助防將) 李薦(李薦)을 포함한 24명의 우위(右衛) 소속의 군병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이재관에 의하면 원래는 장양공 이일의 손자 경상좌수사 이견(李汧, 1618~?)이 조부의 공훈을 기념하고 후세에 알리고자 그림을 그려 종손(宗孫)과 지손(支孫)의 집안에 보관하였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 남은 것이 한 건 밖에 없게 되자 1849년에 다시 신본(新本) 3건을 만들어 예전에 가장(家藏)했던 대로 보관한다는 내용이다. 전형적인 계축 형식이지만 좌목의 인물들이 공유하였던 결계(結契)의 기념화가 아니라 집안 조상의 행적을 기리기 위한 집안 차원의 기념화로 제작된 점이 주목된다.

좌목 말미에 글을 쓴 이재관이 조선후기 화원(畵員)인 소당(小塘) 이재관(李在寬, 1783~1837)인지에 대해서는 좀 더 연구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림의 작자가 이재관인지 아닌지의 여부와 상관없이 이 그림은 당시의 전투 상황이 잘 표현된 우수한 작품으로 부감시에 의해 여진족 시전부락 일대의 지세(地勢)가 잘 드러나 있고, 전투하는 군사들과 오랑캐들의 모습도 다양한 자세와 움직임으로 그려져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산은 먹선으로 윤곽을 그리고 작은 점을 골고루 찍었으며 나무에서는 화보풍의 남종화풍이 엿보인다. 채색은 적색, 황색, 갈색, 엷은 녹색 위주로 담채되었다.

이와 같이 <장양공정토시전부호도>는 전형적인 계축 형식을 지녔지만 결계(結契)의 기록물이 아니라 조상의 공훈을 기리기 위한 집안 차원의 기념화로 제작된 점, 전쟁 장면을 내용으로 한 점, 무인(武人) 집안에서 주관한 점 등에서 희귀성을 갖고 있고, 이모된 경위가 작품에 확실하게 기록되어 기록화로서의 가치가 인정되고 작품의 수준도 우수하여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한다.

예념미타도량참법 권1~10 (禮念彌陁道塲懺法 卷一~十)

예념미타도량참법 권1~10 (禮念彌陁道塲懺法 卷一~十)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유산 322호
예념미타도량참법 권1~10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유산

예념미타도량참법은 아미타불을 정성껏 예배함으로써 극락왕생을 염원하는 의식을 수록한 책으로 중국 금나라의 거사 왕자성(王子成)이 엮은 것이다. 전 10권 2책으로 권1-5(제1책), 권6-10(제2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인경 당시 시주자는 중간 서문 뒤의 “인경시주각휘비구위 현비류씨영가(印經施主覺輝比丘爲 顯妣柳氏靈駕)” 등의 기록으로 알 수 있으며, 이와 같은 기록은 제1책에 한 곳, 제2책에 두 곳에 묵서되어 있다.

이 책은 간행연도를 알 수 있는 발문 등의 기록은 없지만, 동종의 판본들과 서지인 형태를 비교해 보면, 1474년(성종 5)에 간행된 보물 제949호(국립중앙박물관 소장)와 형태적인 특징은 거의 동일함을 알 수 있으며, 난외에 각수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는 점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각수(刻手) 이름이 새겨진 판본으로 간년이 확인되는 것으로는 1503년경에 간행된 직지사 소장의 보물 제1241호(권 6-10의 1책)가 있는데, 권미의 발문에 “弘治十六年癸亥暮春上澣直指寺老衲燈谷學祖七十二歲書于東 廂〔홍치십육년계해모춘상한직지사노납등곡학조칠십이세서우동상〕”라는 기록이 있어 1503년경에 간행된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책의 제1책 권미에는 인경(印經) 당시의 역할을 보여주는 “화주 육만, 별좌 봉은, 인장 유색 조옥(化主 六萬, 別座 奉恩, 印莊 有赜 照玉)” 등의 묵서가 있다. 그런데 고양시 원각사 소장본(동일한 판본으로 10권 2책 완질)에도 이와 유사한 묵서가 있는데, 제2책의 권미에는 “화주 육만, 별좌 봉은, 인장 유색(化主 六萬, 別座 奉恩, 印莊 有赜)”이라는 묵서가 그것이다. 따라서 이 책과 원각사 소장본은 거의 같은 시기에 동일한 인물에 의하여 인경 된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양자 간의 내․외형적 상태로 볼 때 이 책이 원각사 소장본보다 먼저, 보다 구체적으로는 적게는 수 년, 많게는 수 십 년 전에 인쇄된 것으로 추정된다.

원각사 소장본은 제2책 권미에 “乾隆三十二年丁亥五月日海印寺印來〔건륭삼십이년정해오월일해인 사인래〕”라는 묵서가 남아 있어 이 책이 1767년 5월에 해인사에서 인쇄한 판본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책은 원각사 소장본 보다 이전인 18세기 중기 경에 인쇄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전국사찰소장목판집》에 따르면, 예념미타도량참법 목판은 해인사에 1종(총 111판)만이 완전하게 전한다. 그러나 해인사 목판은 정암사 소장본과 서지적인 형태가 다를 뿐 아니라 묵재(黙齋)가 1576년(만력 4)에 쓴 발문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판본(異版本)이다. 그러므로 정암사 소장본의 목판은 전하지 않는 것으로 판단된다.

위의 사실로 보아 정암사 소장본은 학조의 발문은 없으나 1503년(연산군 9)에 1474년(성종 5) 간본을 거듭 새긴 목판으로 18세기 중기에 후쇄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동일한 인경자들이 완성한 원각사 소장본에도 학조의 발문이 없기 때문에 정암사 소장본은 원래부터 학조의 발문이 없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결론적으로 이 책은 간행연도를 판단할 수 있는 발문 등의 기록이 없지만 동종의 판본들과 서지 상태를 비교해 본 결과 1503년경에 거듭 새긴 목판으로 18세기 중기에 후쇄한 판본임을 알 수 있으며 동일 판본이 고양 원각사 소장본(2책)과 동국대학교 도서관 소장본(1책) 정도만 전하는 등 전본이 매우 희귀하다.

학림사 석조약사여래삼불좌상 및 복장유물 (鶴林寺 石造藥師如來三佛坐像 및 服藏遺物)

학림사 석조약사여래삼불좌상 및 복장유물 (鶴林寺 石造藥師如來三佛坐像 및 服藏遺物)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유산 336호
학림사 석조약사여래삼불좌상 및 복장유물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유산

이 불상은 높이가 49-61㎝의 중소형불상으로, 불상은 머리를 약간 앞으로 내밀어 구부정한 자세를 취하고 변형편단우견(變形偏袒右肩)과 선정인을 취하고, 그 위에 화문으로 장식된 약합을 들고 있다. 불상의 바닥면에는 복장공이 있고, 내부에 복장이 들어있다.

조성기가 없어 제작 시기와 조각승을 밝힐 수 없지만 조선후기 불교조각사에서 개별 조각승의 양식적 특징을 잘 반영했다.

도안사 은선묘아미타삼존도 (度岸寺 銀線描阿彌陀三尊圖)

도안사 은선묘아미타삼존도 (度岸寺 銀線描阿彌陀三尊圖)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유산 383호
도안사 은선묘아미타삼존도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유산

홍색으로 물들인 비단바탕에 은선(銀線)으로 그리고, 얼굴·머리 등에 부분적으로 채색을 첨가한 은선묘아미타삼존도로, 화면에 아미타불・관음보살・지장보살・2비구(가섭, 아난존자) 외에 설법을 듣기위해 구름을 타고 모여드는 10타방불이 좌우 5구씩 최상단에 묘사된 배치 구도이다.

화기의 제작연대는 육안으로 구별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으나, 18세기 성행하던 선묘불화의 화풍으로 미루어, 1762년경에 조성된 작품으로 추정된다. 훼손과 변색이 보이지만, 당시 선묘불화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는 유물이다.

채용신 필 황석 초상 (蔡龍臣 筆 黃淅 肖像)

채용신 필 황석 초상 (蔡龍臣 筆 黃淅 肖像)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유산 524호
채용신 필 황석 초상

<채용신 필 황석 초상>은 대한제국 시기 육군 부위(副尉, 현재의 중위)를 지낸 황석(黃淅, 1848~1938)의 초상화이다. 화면 중간의 향 좌측에는 주문방인(朱文方印) [석지(石芝)]와 [정산군수채용신신장(定山郡守蔡龍臣信章)]이 찍혀있어 이를 통해 채용신 작품으로 판단할 수 있다. 채용신은 1906년 이후 채용신은 상기 두 도장을 빈번하게 사용하였으며, 1910년대 전중반 작품에 특히 흔하게 확인된다. 육리문(肉理文) 표현 등 전통적인 초상화 기법과 서양 명암법의 혼용, 콧등을 밝게 처리하고 얼굴과 닿는 부분에 명암을 주어 코 부위가 다소 두툼해 보이는 점, 옷의 굴곡 중 어두운 면에는 옷 색과 비슷하면서도 좀 더 짙은 색으로 선염을 하고 밝은 부분에는 역시 동색 계열로 강조하는 방식, 1905년부터 1910년대까지 빈번하게 확인되는 돗자리의 문양 등에서도 채용신의 기법이 확인된다.

화면에는 직조 상태상 두 종 이상의 비단이 이용되었다. 회장(回粧)은 아래쪽이 마련되어 있지 않아 사면회장(四面回粧)으로 볼 수 없다. 그리고 이 회장 부분의 천은 화면의 천과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즉 하나의 비단을 사용하면서 화면에 해당하는 부분을 회백색으로 채색하고 회장에 해당하는 부분을 그대로 남김으로써 별도의 천을 사용한 것처럼 보이게 했다. 화면 위와 아래에는 청색의 변아(邊兒)가 마련되어 있다. 위쪽 변아에는 수자문(壽字紋)에 박쥐문(蝠紋)을 두른 길상문 4개가 직조된 비단이 사용되었다. 이 문양은 19세기 후반 이후 복식에서 자주 확인된다. 반면 아래쪽 변아는 회장 부분처럼 화면과 하나로 이어진 비단이다. 다만 청색을 칠하여 마치 별도의 비단을 사용한 변아로 보이는 효과를 내었다.

초상의 위와 아래 각각에는 상죽(上竹)과 하죽(下竹)이 있다. 상죽은 반원형이며, 좌우 끝의 과두(裹頭)는 자색(紫色) 천을 감쌌다. 하죽 좌우의 막이(莫只)는 적색 종이를 감쌌다. 상죽에는 당시에 제작된 원환(圓環)이 박혀 있으며 이 장치에 당시 제작된 자색(紫色) 영자(纓子)가 연결되어 있다. 이 영자의 끝에는 유소(流蘇)가 있다.

보존 상태는 채색의 박락이 보이며, 돌기 기법을 한 부분은 일부가 떨어진 상태로 양호한 편은 아니나, 대한제국의 부위 복장이 비교적 정확하게 묘사되어 있는 초상화로 해당 시기의 군복 복식 연구에 적합하다.

안필호, 숙부인 장흥마씨 부부 초상 (安弼濩, 淑夫人 長興馬氏 夫婦 肖像)

안필호, 숙부인 장흥마씨 부부 초상 (安弼濩, 淑夫人 長興馬氏 夫婦 肖像)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유산 526호
안필호, 숙부인 장흥마씨 부부 초상

<안필호 초상>
초상화의 주인공은 호피를 덮은 의자에 앉아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군복을 착용하고 있는데, 머리에는 공작꼬리털이 달린 전립(戰笠)을 쓰고, 협수(挾袖) 위에 전복(戰服)을 입은 후, 가슴에는 전대(戰帶)를 매고 있는데, 모란장식이 있는 띠돈을 붙였다. 왼편 겨드랑이에 환도(還刀)를 차고 오른손으로는 지휘봉인 등채(藤策)를 쥐고 있다. 이러한 복식은 고종대에 이루어진 몇 차례의 의제개혁(衣制改革)의 변화양상을 보여준다. 얼굴, 의복, 장신구 등의 묘사는 매우 정교하며, 화려한 색채를 다양하게 구사했으며, 서양화법에 해당하는 명암법과 음영법을 적극적으로 사용함으로써 매우 실감나는 초상화가 되었다.

<숙부인 장흥 마씨 초상>
초상화의 주인공은 등받이가 있는 나무 의자에 앉아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녹두색 저고리에 푸른 치마를 입고 있는데, 소매 밖으로 나온 두 손을 표현했으며 반지를 낀 왼손에는 끝이 살짝 말린 하얀 종이를 쥐고 있다. 가르마를 타고 쪽진 머리에는 흰 비녀를 꽂았는데 목 뒤로 살짝 보이는 비녀 양 끝에는 각각 “다자(多子)”와 “손(孫)”이라는 글씨가 있다. 푸른색과 노란색 글씨 표현으로 미루어 볼 때 칠보은비녀(七寶銀簪)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바닥에는 석류와 불수 무늬가 그려진 붉은 자리가 깔려있고 테두리는 옥색 천을 바느질로 마감한 것을 자세히 표현했다.

얼굴의 묘사는 매우 정교하며, 화려한 색채를 다양하게 구사했으며, 옷주름이 접히는 것을 표현할 때는 서양화법에 해당하는 명암법과 음영법을 적극적으로 사용함으로써 매우 실감나는 초상화가 되었다. 위 작품은 조선 중기 이후 거의 그려지지 않던 부부 초상화가 20세기 초에 다시 등장한 것을 알려주는 이른 사례에 해당하며, 당시 군복의 변화양상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중요한 초상화다. 이 시기 초상화가로서 이름이 높던 채용신이 그린 것으로 추정되며, 정교하고 화려하여 예술적 가치가 높은 작품이다. 특히 한 집안의 여러 대의 인물이 일괄로 그려진 드문 예에 속한다.

진법언해 (陣法諺解)

진법언해 (陣法諺解)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유산 554호
진법언해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유산

『진법언해』는 장교 및 군사들을 대상으로 한 군사 훈련 교재다. 숙종 대 무장 최숙(崔橚, 1636~1698)이 한자를 잘 모르는 장교나 군사들이 쉽게 진법을 익히도록 한글로 『병학지남(兵學指南)』 가운데 군사 조련에 필요한 내용을 가감하고, 새로운 내용을 덧붙여서 펴낸 병학서다. 이 책의 원본이라 할 수 있는 『병학지남』은 임진왜란 이후 조선의 군대에서 가장 널리 쓰인 군사 훈련 교재로 『기효신서(紀效新書)』 가운데 군사 훈련의 요점을 뽑아 만든 병서다. 『기효신서』는 명 장수 척계광(戚繼光, 1528~1588)이 중국의 남방지역에 자주 출몰하는 왜구를 소탕하는 과정에서 창안한 병법으로 보병 전술이 핵심이다.

『진법언해』는 현재 2종이 현전하며 조사 대상본은 『병학지남』의 간행 뒤에도 군사 조련에 초점을 맞춘 『진법언해』의 활용과 유용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진법언해』는 『병학지남』을 “일상적인[肉談]” 한글로 “해석”한 책으로 군사 훈련에 초점이 있다. 그런데 『병학지남』의 내용을 그대로 담은 것이 아니라 20% 정도는 편찬자의 독창적인 의견을 첨부했다는 점에서 조선 후기 무장 및 무관들의 군사 전략에 접근할 수 있는 중요한 병서라 할 수 있다. 더불어 『기효신서』의 요약판이라 할 수 있는 『병학지남』을 또다시 편집하여 군사 훈련서로 재탄생시킨 책은 현재 『진법언해』가 유일하다. 『진법언해』는 거의 최초의 한글 전용 문헌이라 할 수 있다.

자치통감 권252~254 (資治通鑑 卷252~254)

자치통감 권252~254 (資治通鑑 卷252~254)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유산 558호
자치통감 권252~254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자치통감(資治通鑑)』의 대대적인 보급이 가능하게 한 것은 세종이다. 세종은 1434년 중추원사 윤회(尹淮, 1380~1436) 등 중신들과 집현전 학자들을 모아 『원위』, 『집람』, 『석의』 등 중국 주석을 참고하여 『자치통감(資治通鑑)』에 주석을 다는 작업에 착수하여 1435년 6월에 완성하였는데 이것이 <사정전훈의 (思政殿訓義)>이다. 『자치통감사정전훈의(資治通鑑思政殿訓義)』를 1436년 2월에 1434년에 주조한 금속활자인 갑인자를 사용하여 294권 100책으로 간행하였다.

육군사관학교 육군박물관 소장본인 『자치통감(資治通鑑)』은 형태적으로 살펴보면 원형 그대로 앞뒤 표지를 유지하고 있으며, 본문의 장수(張數)는 권252 29장, 권253 27장, 권254 28장으로 매장 광곽 좌측에 해당되는 <당의종 (唐懿宗)>과 <당희종 (唐僖宗)>이 인쇄되어 있다. 판식부분은 四周單邊 半郭 27.8×20.0cm, 有界, 10行19字, 註雙行, 上下下向黑魚尾, 크기는 36.7×24.4cm이다. 조사대상본은 『자치통감(資治通鑑)』 294권 100책 중 한 책 권252~254까지로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며 상태 또한 매우 깨끗하다.

『자치통감(資治通鑑)』은 세종 때 <사정전훈의 (思政殿訓義)>를 더하여 1434년에 주조한 금속활자인 갑인자로 1436년에 294권 100책을 인출한 거질의 통사(通史)이다. 현재 10여 점이 보물과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 보호 관리되고 있다. 육군사관학교 박물관 소장본 『자치통감(資治通鑑)』은 초주갑인자라는 자료적 가치와 서지적인 사료 가치가 충분하여 서울시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 보호 관리할 필요가 있다.

노원 정암사 석조석가여래좌상(盧原 淨巖寺 石造釋迦如來坐像)

노원 정암사 석조석가여래좌상(盧原 淨巖寺 石造釋迦如來坐像)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유산 560호
노원 정암사 석조석가여래좌상 : 서울특별시 문화유산

<정암사 석조석가여래좌상>은 노원구 정암사 법당에 봉안되어있는 석조석가여래좌상이다. 불상조성기와 전적이 잘 남아있어 이 불상이 1702년 순천 대흥사에서 조각승 수일(守一)이 제작한 과거칠불 가운데 하나임이 밝혀졌다. 불상조성기는 “時維 康熙四十一 歲次壬午 五月日 全羅左道順天府北嶺桐裡山大興寺緣化比丘等發願文” 즉 “강희 41년 임오년인 1702년에 전라좌도 순천부 북령의 동리산 대흥사에서 발원하는 글”이라는 제목으로 시작한다. 제목에서 알려주듯 이 석조석가여래좌상은 1702년 순천 대흥사에 봉안하기 위해 조성한 것이다. 불상조성기에는 경주 동령(東嶺) 불회산(佛會山)에서 과거칠불(過去七佛)과 오십삼석가존상(五十三釋迦尊像)을 조성한 후 순천 대흥사로 이운하여 봉안했으며, 당시 조성한 과거칠불 가운데 일곱 번째인 석가모니불이라고 적었다.

정암사의 석조석가여래좌상은 불석으로 제작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불상조성기에 경주 동령(東嶺) 불회산(佛會山)에서 제작했다고 적고 있는데, 불회산이 정확히 경상도 동쪽의 어느 산을 지칭하는지 알 수 없지만, 불석이 산출되는 기림사 인근이라고 추정된다. 상의 높이는 50cm가 조금 넘는 크지 않은 상이지만, 보존 상태가 양호하며, 1702년 순천 대흥사에 봉안했던 과거칠불 가운데 가장 중요한 제7 석가모니불좌상임이 밝혀졌다는 점에서 서울시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하여 보호해야 할 가치가 있다.

어사고풍(1792년)

어사고풍(1792년)
어사고풍(1792년)

<어사고풍(御射古風)>이란 왕이 사례(射禮)를 열어 활쏘기를 한 후 자신을 수행한 신하들에게 사은(賜恩)하는 풍습을 말한다.

주로 정조(正祖) 때 사례가 수시로 열렸다. 특히 정조는 사례를 열어 직접 활을 시험했고, 이때 정조의 성적을 규장각 각신이 고풍의 종이에 적어 올렸으며, 정조는 이를 받아 신하에게 내려줄 하사품의 종류를 써넣었다고 한다. 이런 경로로 작성된 ‘어사고풍’은 정조 대의 사례(射禮) 풍습과 그에 수반된 물품 사은의 풍습을 잘 나타내며, 조선 후기 정치사, 군제사, 체육사 등 여러 분야의 좋은 자료이지만, 주로 관찬 사서와 『홍재전서』, 각종 문집을 통한 고증만이 이루어졌을 뿐, 실물 고문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따라서 〈고풍 및 어전 궁술기록책자〉는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가 높다. 특히 정조 대 등으로 작성 시기가 매우 짧고 제한적이며, 자료의 수량 또한 희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