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와한국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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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군에는 2개의 둔토가 있었는데 해등산촌과 강릉위였다. 역토 가운데 상등지가 위토였는데 강릉위의 경우 답 12두락과 전 2식반경을 쌍수역토중에서 일부를 대토해 주어서 이 지역 역둔토 소작인과 분쟁도 야기되었다.

일제시대와 한국전쟁 당시 사람들의 모습 사진

1905년 재정고문 메가다가 부임하면서 황실소유의 토지와 국유재산 정리를 위한 허락을 황실로부터 받아, 이듬해 7월 국유재산관리규정을 제정하여 국유부동산의 목록을 작성하여, 1909년부터 이듬해 7월까지는 역둔토조사를 실시하였다.

한편 1911년 4월 1일 경기도령 제31호로 양주군에는 34면 343동리를 두었는데 지금의 노원면 온수동·납대동·가좌동· 공덕리·장기리·월계리·간촌리· 은행리·양재리· 용동리·묘동리· 불암리·금주리·광석리·오목리· 무수동·갈해동·녹천리와 해등촌면 상누원리·무수동으로 이루어졌다.

1912년 5월 23일에 공포된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경기도편에 의하면 양주군을 32개면, 343동리로 노원면과 해등촌면도 이 중에 속하였다. 914년 4월 1일에는 노원면과 해등촌면을 합쳐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으로 하고 청동리, 도봉리, 쌍문리, 월계리, 공덕리, 하계리, 중계리, 상계리를 관할하였다.

1950년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노원지역에 위치한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의 활약이 눈부시게 빛났다. 졸업을 앞둔 육사생도 1기생과 입교 20일밖에 되지 않은 2기생들이 양주군과 포천의 경계인 부평리에 진지를 구축하고 5시간 동안 적과 대치하여 분전하였으나, 무기열세 및 탄환의 소진으로 의정부가 함락될 무렵 전사한 동료의 시체를 가매장하고 후퇴하였다. 서울이 적에게 함락되면서 생도들은 대부분이 뚝섬쪽으로 후퇴하고 일부는 불암산에 남아 항전하였다. 적의 수중에 들어간 육군사관학교는 적의 의용군훈련소로 바뀌었다.

불암사에 본부를 둔 유격대는 1950년 7월 11일 공산군 100명이 배치된 퇴계원 보급소를 습격하여 적을 섬멸하였으며 8월 15일에는 피난하지 못한 서울 청년들이 강제로 훈련 받고 있던 의용군훈련소(육군사관학교)를 습격하여 의용군훈련생들을 탈출시키기도 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대부분의 유격대가 전사하고, 소수의 남은 대원들이 인천 상륙작전으로 서울이 탈환되자 학교로 복귀하여 임관되었다.

최종수정일 : 2020-01-21 09:46: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