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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월계동 유래
  • 이곳의 지형이 반달처럼 생긴데다 중랑천과 우이천이 이곳을 지나기 때문에 월계동이라는 명칭이 붙었다.
    월계동은 조선 초까지 경기도 양주목 노원면과 해등촌면 지역에 해당되었으나 갑오개혁 때 전국의 행정구역이 조정되면서 경기도 양주군 노원면 월계리,녹천리(鹿鹿理),역촌,능리(陵理)와 해등촌면 창동리가 이에 속하였다. 1914년 4월1일 양주군 노원면과 해등촌면을 합쳐 노해면으로 하고 연촌,능리,월계리,녹천, 창동 일부를 합쳐 월계리로 하여 관할하였으며 1963년 1월 1일 서울특별시로 편입하면서 성북구에 속하였고 별도로 마련된 노해출장소의 관할구역이 되었다. 1973년 7월 1일 도봉구가 신설되자 이의 관할이 되었고 1988년 1월 1일 노원구가 신설되자 노원구 월계동이 되었다. 물고기 모양의 지형으로 된 월계동은 동쪽으로 중랑천이 흐르고 동의 북쪽에서 서쪽으로 북한산의 지맥이 이어지는데 몇 개의 마을이 모여 월계동을 형성하였다. 갑여개혁 때까지는 대개 이 자연부락들이 하나의 마을형태를 이루었는데 1914년 이후 행정단위의 최소단위인 동리(洞理)로 규정되었다. 월계동을 이루는 자연부락은 녹천(鹿川),연촌(硯村),각심절, 능골(陵里),창골(倉洞)인데 이 가운데 창골의 일부는 창동으로, 나머지는 월계동으로 편입되었다.

    월계동의 중심이 되는 녹촌은 녹천(鹿川)이라고도 한다. 북한산 지맥으로 이어진 크고 작은 산맥이 월계동 근방에 오면 높이 100m 내외의 야산으로 변하는데 그 사이로 계곡이 형성되어 있다. 이 계곡들은 서쪽으로 우이천이나 동쪽의 중랑천으로 유입되는데 대개의 하천 지류들은 여러 가닥이 모여 하나의 본류를 형성하게 된다. 이곳의 하천은 두가닥으로 시작해서 767번지 근방에서 하나로 합쳐진다. 이 모습이 마치 사슴머리에 난 뿔 같다 하여 녹촌이라 불렀다. 조선 중기때 중랑천이 범람해서 우이천까지 물이 흘러들어 가는 큰 홍수로 인해 지금의월계로 근방 마을은 모두 폐허가 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황급히 뒷산으로 이주하여 인명에는 피해가 없었지만 가재도구와 넓은 논밭이 온통 황토흙으로 뒤엎여 살길이 막막해졌음을 통탄하면서 이에 대한대책마련을 위해 능록의 뒷산에 모여 회의를 소집 하였다. 회의석상에서 마을의 촌주 한사람이 지난밤 꿈에 신선을 만나 내일 있을 회의를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물었을 때 신선은 내일 정오에 중랑천가에 푸른사슴 한 마리가 내려와 목욕을 할 것이니 제물을 준비해 두었다가 사슴에게 바치고 마을에서 가장 예쁘고 정숙한 처녀 한사람을 사슴에게 시집보내면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는 답을 해주고는 사라졌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여기저기에서 반대하는 의논도 있었으나 이왕 폐허가 된 마을을 살리는 방법이니 한번 실행해보자는 의견으로 기울어 마침내 염씨(簾氏) 집의 15세 난 딸을 사슴에게 시집보내기로 결정하였다. 며칠 후 신선이 시킨대로 산 정상에 제물을 준비하여 사슴이 내려오기를 기다리자 과연 사슴 한 마리가산에서 내려와 중랑천에서 목욕을 하였다. 마을 회의에서 결정한대로 염씨 처녀를 곱게 단장시켜 제물 옆에 다소곳하게 앉혀 두었는데 목욕을 끝낸 사슴이 등을 돌리며 처녀더러 타라는 시늉을 하였다. 처녀는 사슴이 시킨대로 등에 올라탔는데 처녀를 태우고 동네를 한바퀴 돌아본 사슴이 766번지 쯤에서 잠시 멈추었다가 지금의 하천이 생긴 방향으로 사라졌다. 마을사람들은 사슴이 떠난 방향을 바라보자멀리서 물줄기 두 개가 나무가지 모양으로 흐르기 시작하더니 중간쯤에서 합쳐서 한줄기로 되면서 황토흙으로 뒤덮였던 마을 앞 전답이 기름진 검은색으로 바뀌었다. 사람들이 이 신기한 일에 놀라워하자 그중 한사람이 "이건 사슴과 결혼한 염씨 처녀의 눈물이니 냇물 이름을 녹천이라 하자"고 제의하였다. 모든 주민이 만장일치로 그 뜻을 따르기로 하면서 마을이름도 녹촌이라고 하였는데 이때부터 녹촌 혹은 녹천이라고 마을이름을 녹천시내와 혼용하였다. 녹천(鹿川)은 염씨 처녀가 이곳에서 사슴과 결혼했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이날 이후부터 마을이 번성하기 시작했지만 이상하게도 녹천의 남쪽에 있는 능골과 그 아래 마을들은 여성들의 기(氣)가 세어져 음란한 부녀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곳 사람들은 사람을사슴에게 시집보낸 해괴한 일을 한 녹천사람들이 자기 마을에 재앙을 내린 것이라 하여 녹천과 왕래조차하지 않고 등을 지고 살게 되었다.

    능록에 정간(貞簡) 이명(李蓂)의 무덤을 만들 때 지나가던 승려가 이곳은 헌화형(獻花形) 이어서 "자손은 번창하지만 음란하니 앞으로 많은 사람들이 밟아서 지기(志氣)를 다스려야 하는 곳으로 될 땅"이라 하였다. 헌화형은 양다리를 벌려서 중간 구덩이를 연 것과 같은 풍수리지설에 의한 지세인데 여인이 다리를 벌린 형태이므로 음란하다 하여 주택지나 음택(陰宅)으로 별 환영을 받지 못하는 곳이다. 마을사람들은 동네 재앙을 막을 수 있는 비법에 대해 물었는데 승려는 녹촌과 혼인을 금하고 등을 지는 형태로 집을 짓고 마을의 동쪽에 절을 세우면 동네 화근이 사라진다 하였다 절의 이름을 마음을 다스린다는 뜻에서 각심사(覺心寺)라고 붙이라 했는데 녹천사람을 원수로 여기지 말고 자신의 마을에 액운이 깃들어 그러니 남을 원망하지 말라는 뜻으로 지어준 것있었다. 마을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그대로 행했는데 이때부터 능골과 그 아랫마을 사람들의 집은 녹천을 등지고 지었으며 각심사에서 아침저녁으로 공양을 하였다. 승려의 말대로 수백년이 지나서 헌화형의 중심이 되는 곳에는 신창중고등학교,염광여중고, 월계동고등학교,인덕공업전문대학이 들어서 땅의 억센 기운이 뻗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한편 녹촌에는 조선 세종의 6대손이 되는 사람의 별당이 있었는데 그를 녹촌대감이라 하였다. 주변은 모두 그의 사지(賜地)였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소작인 노릇도 하였다. 월계동 513~534번지 일대는 연촌(硯村) 혹은 벼루말이라 한다. 높이 120m의 엄정산 아래에 위치한 이 마을은 132번지 일대에 연못이 있어서 전체적인 모양이 벼루같아 보인다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안골이라고도 부르는이 일대는 동쪽의 하계동을 붓골(佛骨), 동남쪽의 묵동을 먹골이라 하여 문방사우 가운데 셋이 모여있기 때문에 언젠가는 이 일대에서 문재(文才)가 나올 것이라는 예견을 했는데 1937년에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가 하계동에 세워지자 이 예언이 맞았다고 믿었다.

    월계동 760~780번지 일대를 능골 혹은 능리(陵理),능안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산 55번지에 이명의 신도비가 있고 750번지에 그의 무덤이 있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인데 이조참판,우의정,좌의정을 거쳐 영중추부사를 지냈던 조선시대의 청백리인 이명의 무덤이 워낙 커서 능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군이나 대군, 임금의 경우만 신도비를 세웠기 때문에 신도비를 세울 정도면 대단한 인물이라는 뜻에서 능이라 불렀는데 그의 무덤 주변에 자리잡은 마을이라 하여 능골이라했다. 능골은 녹천과 함께 월계동을 이루는 중심부락인데 각심부락과는 서로 이웃해 있다. 두 마을 모두 산제(山祭)를 지내고 있다. 이명(1496~1572)은 명종 때 나서 중종 때 죽었는데 윤원형이 일으킨 을사사화로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의 신원에 앞장섰던 사람이다. 청렴 결백하여 청백리로 선정되었는데 그의 신도비는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55호로 지정되어 있다. 화강암의 좌대석 위에 대리석으로 세워진 그의 신도비는 뚜껑돌 없이 윗부분이 둥근 반월형으로 되어 있다. 1937년 경충선이 개설되면서 85번지에 성북역이 만들어졌는데 처음 이름은 연촌역이었다. 1963년 3월 5일 성북역으로 개칭된 이 역은 경원선과 경춘선 교외선 및 수도권 전동차가 정차하는데 당초에는 장위역이라는 명칭을 붙였다가 월계역으로 바뀌었다. 일본어로는 월계를 월경(月經)과 같은 겟게이」라고 읽으므로 발음관계상 옛지명의 하나인 연촌으로 바뀌었다. 1938년 경원선이 개통되면서 성북역은 사실상 동북부 방향의 서울로 진입하는 관문이 되어 이를 중심으로 많은 시장이 서게 되었고 이 때문에 성북역주변은 강원도 지방에서 수송되어 온 시멘트와 무연탄의 보관창고가 들어서게 되었다. 우이천을 건너 이웃한 장위동 주민들의 전답이었던 월계동이 번창하기 시작한 것도 경원선과 경춘선이 놓여지면서 였는데 버려지다시피한 중랑천 서쪽 호안을 서울시에서 택지정리하여 아파트단지를 건립하면서 일대의 면모를 달리하게 되었다.
  • 월계동 연혁
  • 1914년 4월 1일 양주군 노원면과 해등촌면을 합쳐 노해면으로 하고 연촌, 능리, 월계리, 녹천, 창동 일부를 합쳐 월계리로 하여 관할하였으며 1963년 1월 1일 서울특별시로 편입되면서 성북구에 속하였고 별도롤 마련된 노해출장소의 관할구역이 되었다. 1973년 7월 1일 도봉구 신설로 관할지역이 변경 되었고 1988년 1월 1일 노원구가 신설되면서 노원구 월계동이 되었다.